누구나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될 수 있어
영화 <정순>은 영화 <경아의 딸>에서 엄마와 딸의 처지가 뒤바뀐 버전이다.
일찍이 남편을 여읜 정순(김금순 분)은 곧 결혼을 앞둔 딸 유진(윤금선아 분)과 단둘이 살고 있다.
오랫동안 살고 있는 동네에서 정순은 견과류 공장에, 유진은 폐차장에 다니고 있다.
남편도 없고, 경제적 여유도 없는 정순은 회사에서 수시로 갑질을 당하지만, 먹고 살아야 하니 참는다.
그러던 어느 날, 공사장에서 일하다 무릎을 다쳤다는 영수(조현우 분)가 입사한다.
비슷한 또래에, 둘 다 외로운 처지라 정순과 영수는 금세 친해진다. 영수가 지내는 여관에 가서 서로 ‘뜨거운 밤’을 보내며 오랜만에 욕구를 풀기도 한다.
처음엔 속옷만 입은 모습이 부끄러운지 영수가 사진이라도 찍으려 하면 이불로 꽁꽁 온몸을 감싸던 정순이, 어느 순간 속옷만 입고 춤추며 노래하는 모습을 영수가 영상으로 찍어도 아무 소리 안 할 정도로 친해진다.
그런데 이 영상이 어쩌다가 정순이 일하는 공장의 젊은 남녀 직원들에게 퍼지더니. 어느덧 유진이 일하는 폐차장 직원까지 볼 정도로 동네에 쫙 퍼진다.
뒤늦게 자기 영상이 퍼진 걸 알게 된 정순은 그 길로 옷을 뒤집어쓴 채 공장에서 뛰쳐나와 한참을 가다가 갑자기 길 한 가운데서 기억을 잃고 그대로 굳는다.
경찰의 연락을 받고 달려온 유진은 정순이 치매인가 싶어 병원에 데려가지만, 정순이 완강히 거부해 진료조차 못 받고 집으로 온다.
나중에야 엄마에게 무슨 일이 생긴지 알게 된 유진이 대신 경찰에 고소한다.
그러나 영수가 집으로 찾아와 정순에게 자기는 무릎이 안 좋아서 취직도 힘든데, 전과자까지 되면 진짜 먹고 살 수 없다며 읍소한다.
자기 생각만 하는 영수의 모습에 기가 막힌 정순이 매몰차게 그를 무시한다.
이후 집에만 있던 정순은 한참이 지나서 운전 연수를 하면서 다시 세상에 나온다.
그러던 어느 날, 가해자들이 잘 지내고 있는 걸 목격하고 다시 공장에 출근한다.
영화 <정순>은 중년 여성이 디지털 성범죄에 노출돼 고통을 겪는 일을 그린 작품이다.
과거 정순처럼 공장에서 일했던 정지혜 감독이 어느 날 디지털 성범죄를 접하고서, 같이 일하던 중년 여성들이 이런 일을 겪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마음으로 이 작품을 기획하게 됐다고 한다.
특히 <69세>나 <갈매기>처럼 중년 여성이 성범죄 피해자인 다른 영화와 차이점으로, 피해사실에만 집중하기보다 정순이라는 한 사람의 삶의 태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을 꼽았다.
또 정순이 다시 공장에 간 이유에 대해 정 감독은 사회가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모습뿐 아니라, 정순의 결연함과 떳떳함을 보여주고 싶어서 정순이 다시 공장에 찾아가 (영상 속에서처럼) 노래하는 장면을 넣게 됐다고 말했다.
이른바 ‘N번방 사건’을 계기로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국민의 경각심이 높아졌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사실은 그 피해자가 남성이나 중년 여성도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누군가는 재미로 영상을 찍고, 유포하지만, 누군가에겐 평생 잊지 못할 아픔이 될 수도 있다.
정순은 영수가 영상을 찍는 건 알았지만, 유포할 줄은 몰랐고, 유포에 동의하지도 않았다.
영수는 같이 일하는 젊은 관리자 도윤(김최용준 분)의 강요로 어쩔 수 없이 유포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정순의 동의 없이 영상을 유포한 책임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몇 해 전부터 외국에선 부모가 어린 자녀의 알몸 사진을 SNS에 올렸다는 이유로, 성장한 자녀들이 부모를 고소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아무리 어린 자녀라고 하더라도, 아무리 애인 사이라고 할지라도, 동의 없이 은밀한 영상이나 사진을 함부로 유포하는 건 범죄다.
디지털 성범죄에 대해 다시금 생각케 하는 영화 <정순>은 오는17일 개봉한다.
/마이스타 이경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