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우월주의자, 흑인의 기사가 되다
뉴욕의 한 클럽에서 일하던 ‘떠버리 토니’라는 별명을 가진 허풍쟁이 토니 발레롱가(비고 모텐슨 분)는 클럽이 2개월간 리모델링에 들어가면서 졸지에 실업자 신세가 된다.
그런 그에게 우연히 어떤 박사로부터 운전기사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고, 돈 버는 일이라면 뭐든지 감사한 처지에 알려준 주소로 찾아간다.
그가 찾아간 곳은 다름 아닌 그 이름도 유명한 카네기홀.
이곳에 사는 천재 피아니스트이자 심리학 박사인 돈 셜리(마허살라 알리 분)를 마주하게 된 그는 흑인에게는 위험지역인 미국 남부 투어에 동행할 기사 겸 매니저가 필요하다는 말에 주급을 100불이 아닌 125불로 높여서 부르며 배짱을 부린다.
사실 토니는 자신의 집수리를 위해 온 흑인 수리공이 마신 물 컵을 곧바로 쓰레기통에 버릴 정도로 극심한 인종차별주의자이지만,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라 돈만 많이 준다면 흑인 연주자 밑에서 기사 노릇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태도를 취한다.
결국 평소 언행이 거친 토니가 오히려 보디가드로 낫겠다 싶었는지, 돈 셜리는 결국 토니의 제안대로 주급 125불을 주기로 하고 8주간의 남부 투어 공연을 떠난다.
이탈리아에서 이민 온 백인인 토니는 난생처음 들어보는, 그런 책이 있는 줄도 까마득하게 몰랐던 ‘흑인운전자를 위한 그린북’이라는 가이드 북을 음반사로부터 건네 받는다.
이 책자에는 인종차별이 극심한 미국 남부지역을 여행하는 흑인 운전자가 안전하게 묵을 수 있는 숙소 정보 등 다양한 내용이 담겨있다.
첫 번째 도착한 숙소는 ‘집처럼 편안한 숙소’라는 가이드 북의 내용과 달리 언제 무너져도 이상할 것 없는 허름한 여관이다.
물론 이곳은 흑인전용으로 백인인 토니는 다른 숙소에서 잘 예정이다.
언행이 거칠고 교양 없는 백인 토니와 달리, 흑인이지만 교양 있는 말투와 높은 지적 수준에 고상한 생활양식까지 갖춘 돈 셜리는 담담하게 이런 현실을 받아들인다. 마치 아무리 백악관에 2번이나 초청받고, 많이 배웠어도 흑인이기에 늘 겪어왔던 일처럼 말이다.
이후 두 사람은 남부지역 곳곳을 돌면서 대중들 앞에서 연주를 성공적으로 마친다.
하지만 모든 여정이 순조로운 것만은 아니다. 어느 주에서는 일몰 후 흑인이 돌아다닌다고 경찰서에 끌려가는가 하면, 흑인을 위해 백인이 운전을 한다고 이상하게 쳐다보는 시선이야 이제는 하루 이틀 일도 아니다.
여기에 더해 숙소에 마련된 위스키를 다 마시고 인근 술집에 가서 술을 더 마시려다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로 백인 손님들에게 죽도록 얻어맞는 걸 백인인 토니가 달려가 간신히 무사히 데리고 나오기도 한다.
영화 같은 이야기가 아니라 1960년대 미국에서 벌어진 실제 이야기다.
12월 23일 밤에 8주간의 투어를 마친 후, 크리스마스 이브에 꼭 가족과 함께 보내게 해 주겠다고 토니에게 철썩 같이 약속했던 돈 셜리는 마지막 공연을 위해 남부의 한 호텔로 향한다.
말로는 극진한 환대를 하면서도 정작 그에게 안내된 대기실은 겨우 의자 2~3개 놓을 수 있는 좁은 창고.
이곳에서 옷도 갈아입고 편하게 휴식도 취하라는 건데, 뭐 이쯤이야 자주 겪어 온 차별이니 그냥 넘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공연 전 허기를 달래기 위해 그의 단원들과 운전기사 토니가 식사 중인 식당에서 같이 식사를 하려고 하자, 호텔 측은 전통이라며 흑인은 식사를 할 수 없다고 막아선다.
곧 이 식당 안에서 연주를 하러 온 게스트에게 식사를 할 수 없다니 무슨 말이냐며 토니와 함께 항의해 보지만, 그냥 그 좁은 창고에 가져다 줄테니 거기서 먹든지 아니면 외부 식당에서 따로 밥을 먹고 오란다.
흑인을 사람 취급도 안 하던 토니가 8주간 흑인 뮤지션인 돈 셜리와 다니며 몸소 느낀 바가 있었는지, 이런 대접 받고 뭐하려고 공연을 하느냐며 그를 데리고 호텔 밖으로 나온다.
결국 두 사람은 마지막 공연을 거부한 채 다시 뉴욕으로 돌아오고, 크리스마스 전야를 가족과 함께 보내게 해 주겠다는 약속을 지킨다.
영화 <그린 북>은 두 사람의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로, 토니 발레롱가의 아들 닉 발레롱가가 제작을 맡았다.
그는 아버지인 토니 발레롱가의 인생의 전환점이 된 두 사람의 투어 공연 이야기를 스크린에 담아냈다.
이를 위해 아버지가 남긴 비디오와 오디오 자료는 물론 가이드 북, 팸플릿 등 다양한 자료를 참고해 영화에 녹여 냈다.
덕분에 제작진이 구현해 낸 자신이 어릴 적 살던 집 세트를 보고 너무나 똑같아 모니터를 볼 때마다 울컥했다고.
참고로 토니와 돈 두 사람은 투어 공연 이후 50년 동안이나 우정을 쌓으며 지내다가 지난 2013년 몇 달 차이로 두 사람 모두 세상을 떠났다.
인종차별을 비롯한 모든 차별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하는 영화 <그린 북>은 다음 달 9일 개봉한다.
/마이스타 이경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