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아직 세상은 따뜻하다
장애인 부모 열에 아홉은 소원을 물으면 장애인 자녀보다 하루 후에 죽는 것이라고 답한다. 장애로 인해 신체적, 제도적으로 대한민국에서 혼자 살아가기 힘든 현실 속에 돌봐줄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살아가겠나 걱정으로부터 나오는 대답이다.
물론 장애의 종류나 교육수준, 경제수준 등 여러 요소에 따라 상황은 다르겠지만, 발달장애인의 부모는 더더욱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혼자서 사회생활은 고사하고 밥 짓고, 빨래하는 등의 일상생활도 힘든데 내가 세상을 뜨면 누가 돌봐줄까 걱정해 극단적인 경우 장애인 자녀와 동반자살을 하기도 한다.
9일 개봉한 고두심, 김성균 주연의 영화 <채비>는 이 부분에 대해 자세히 다룬 영화다.
거리 가판대를 운영하며 근근이 살아가는 두 모자(母子). 요즘 들어 부쩍 몸이 안 좋아진 엄마(고두심 분)는 나이 서른이 된 아들 인규(김성균 분) 걱정에 잠도 제대로 못 잔다.
오죽하면 꿈에서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연탄불을 피우고 같이 죽을까도 생각할 정도다.
하지만 그런 엄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인규는 밥상에 계란 프라이가 없으면 밥 한술 뜨지도 않고, 가판대 근처 유치원에 새로 온 선생님(신세경 분)을 훔쳐보는 것이 유일한 낙이다.
곧 세상을 떠날 날이 다가온 엄마는 그런 인규가 혼자 자립(自立)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발달장애인들로 구성된 빵집에 취직을 시킨다.
그녀는 인규에게 빵집에서 집까지 버스 타고 가는 법, 계란 프라이 하는 법, 세탁하는 법 등 자립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하나씩 가르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인규에게 쌀쌀맞은 인규의 누나(유선 분)에게 그를 잘 보살펴 달라고 신신당부 하고, 자신은 세상과 이별할 채비를 갖춘다.
이 영화는 몇 해 전 TV에서 방송된 80대 노모와 50대 발달장애인 아들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본 감독이 영감을 얻어 꼼꼼히 자료조사를 한 후 제작하게 됐다고 한다.
처음 시나리오를 접한 유선은 선뜻 캐스팅에 응했고, 고두심과 김성균을 직접 추천하기도 했다고 한다.
또 특별출연한 신세경 역시 시나리오를 접한 후 출연을 결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영화 속에서 인규의 주변 인물들은 하나 같이 선하다. 서대문구청 복지계장인 박철민은 늘 진심으로 인규 모자를 도와줄 방안을 강구하고, 그의 아내인 약사 김희정도 인규 엄마에게 동정이 아닌 사랑으로 대한다.
인규가 짝사랑 하는 유치원 교사 신세경은, 인규 엄마가 찾아와 우리 아들이 고백하면 세상에 뜻대로 되지 않는 힘든 일도 있다는 걸 깨닫게 매몰차게 거절해 달라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인규가 고백하자 자신은 애인이 있으니 서로 친구로 지내자며 따뜻하게 대해준다.
인규와 딱 정신연령이 맞는, 아직 초등학교도 안 다니는 누나의 딸 미솔(김하연 분)은 엄마나 외할머니 보다 더 외삼촌 인규를 잘 이해해준다.
물론 세상에는 이런 좋은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수십 년 동안 무일푼으로 노예처럼 부려먹고, 그것도 모자라 구타와 학대까지 하는 이들도 있다.
실화에 근거해 제작된, 지난 4월 개봉한 영화 <지렁이> 속 여주인공(오예설 분)은 단지 아버지(김정균 분)가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친구들에게 강간까지 당한다.
이처럼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이 살아간다는 것은 매우 힘들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영화 <채비> 속 주인공들 같은 이웃들도 분명 존재한다는 것이다.
영화 <채비>는 초겨울 날씨가 된 요즘, 따뜻함을 선사해 주는 영화다.
/마이스타 이경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