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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톱기사(우측)한국영화

시민들 스스로 진실 파해쳐

영화 206 사라지지 않는 스틸컷

1945년 독립을 맞이했으나, 1948년 제주에서 ‘4·3사건’이 일어났다. 그리고 1950년부터 1953년까지 이어진 ‘6·25 전쟁’ 기간 중 우리나라 전역에서 민간인 학살이 이뤄졌다.

영화 <웰컴투 동막골>처럼 양민들은 국군이든 공산군이든 마을에 찾아와 밥을 달라거나 며칠 쉬었다 가게 해 달라고 하면 인정에 혹은 두려움에 응했을 뿐인데, 이승만 정부는 이들이 부역자라며 ‘빨갱이’ 꼬리표를 붙여 집단 학살했다.

1960년 ‘양민학살사건 진상조사특별위원회’가 꾸려져 이들의 유해를 발굴하기 시작했으나, 이듬해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한국전쟁유족회를 이적단체로 규정한 후, 유해발굴을 중단시켰다.

빨갱이니까 죽였지 국가에서 죄 없는 양민을 죽인 게 아니라는 이유에서 말이다.

이때부터 우리 사회에선 당시의 사실을 알면서도 차마 나 자신도 빨갱이로 몰릴까 봐, 과거 국가권력에 의해 죽은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없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이른바 ‘레드 콤플렉스’가 국민들 마음에 자리잡은 것이다.

이후, 2005년 제1기 진실화해위원회가 출범해 민간인 학살 진상 조사 및 유해발굴이 재개 되었으나, 소기의 성과만 달성한 채 2010년 위원회가 해체됐다.

아직도 발굴할 곳이 많이 남은 상황에서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 출신들과 학계 전문가, 자원봉사자 등이 모여 이른바 ‘시민발굴단’을 결성했다.

다큐멘터리 영화 <206: 사라지지 않는>은 시민발굴단의 유해발굴 과정을 기록한 작품이다.

7일 열린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충북대 고미술사학과 박선주 명예교수는 정부 주도의 발굴은 관련 법이 없어 문화재 발굴에 준해 발굴작업이 이뤄지고 있는데, 시민발굴단은 전문가부터 대학생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해 오히려 더 큰 힘이 되고 있다며, 자원봉사자도 발굴에 참여할 수 있도록 법제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이날 간담회에는 시민발굴단 자원봉사자인 대학원생 김나경 씨도 참석했는데, 그는 대학생 시절 학점 이의신청을 했다가 노용석 교수로부터 시민발굴단 참여를 권유받고 활동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비록 처음 시작은 학점을 더 잘 받기 위해서였지만, 지금은 후배까지 시민발굴단에 인도해 함께 활동할 정도로 적극적으로 활동 중이다.

심지어 이 작품의 연출을 맡은 허쳘녕 감독마저 촬영보다 발굴에 더 열심이었다는 후문.

그러나 정부 주도의 발굴엔 임금문제 등 여러 사정으로 이들처럼 시민 자원봉사자의 참여가 불가능한 상황이다.

허 감독은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이 작품은 결과가 아닌 과정에 관한 이야기를 담았다고 밝혔다.

어쩌면 유해 몇 구가 더 발굴되었는지보다 정부가 포기했을 때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발굴단을 조직해 계속 이어갔다는 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

참고로 영화의 제목인 ‘206’은 사람의 몸을 구성하는 뼈의 개수다.

다큐멘터리 영화 <206: 사라지지 않는>은 오는 21일 개봉한다.

/마이스타 이경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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