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가 만들어낸 비운의 천재
2016년 개봉한 영화 <세기의 매치>는 냉전 시대 미국과 러시아가 체스를 통해 양국의 자존심 대결을 넘어선 ‘보이지 않는 3차 세계대전’을 벌이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8연승을 거두며 세계 챔피언 자리를 고수 중인 미국의 바비 피셔는 늘 도청에 신경 쓰고, 공산주의자와 (본인도 유태인이면서) 유태인에 대한 피해망상을 가지고 있는, 편집증과 피해망상 환자다.
정도는 점점 심해져서 자기가 탄 비행기를 (러시아가) 폭파시키고, 호텔방 TV에 몰래카메라를 설치해 감시할지 모른다고 생각할 정도로 악화된다.
그런 그가 라이벌인 러시아의 보리스 스파스키와 세계대회에서 맞붙기 위해 아이슬란드로 향하던 중, 약속과 달리 공항에서 기자들이 사진을 찍었다는 이유로 그대로 줄행랑을 친다.
특정 날짜까지 아이슬란드에 입국하지 않으면 실격될 위기에 처한 그는 결국 우여곡절 끝에 아이슬란드에 입국한ㄴ다.
이 두 사람의 경기를 보기 위해 닉슨 대통령이 집무실에 TV를 놓을 정도였다고 하니 얼마나 미국과 러시아 두 국가 간의 관심이 높았는지 잘 보여준다.
첫 번째 게임 도중 바비는 중계 카메라에서 지지직 소리가 난다며 갑자기 일어나서 항의하고, 이러한 어수서한 행동이 경기 집중력을 떨어뜨리기 위한 행동이라고 판단한 러시아 측에서 강하게 항의한다.
결국 첫 번째 판에서 바비가 패배하게 된다.
그는 다음 판을 앞두고 소음 없이 게임을 진행하기 위해 관객과 카메라를 치우고, 말을 내려놓을 때 소리가 안 나도록 체스 판을 바꾸고, 소음이 없는 좁은 탁구장으로 장소를 바꾸지 않으면 더 이상 참가할 수 없다고 요구하다 불참으로 실격패를 당한다.
이에 상대편 선수인 보리스는 바비가 질까봐 빠져 나가기 위해 미친 척을 하는 것이라며, 이렇게는 이기기 싫다며 결국 바비의 요구를 수용한다.
어렵게 열린 3번째 게임에서 바비의 첫 수는 자살처럼 보였으나 결국 승리를 거뒀고, 예민해진 보리스는 5번째 게임에서 의자에서 진동이 느껴진다며 집중을 못해 진 후 X-Ray로 의자를 촬영해 죽은 파리 2마리를 발견한다.
결국 마지막 6번째 게임에서 아무도 보지 못한 수로 보리스를 당황하게 한 바비가 12.5:8.5로 최종 승리를 거둔다.
하지만, 이후 그의 정신건강은 계속 악화돼 수백만 불의 광고 제안도 거절하고, 1980년에는 부랑죄로 체포되는가 하면, 2005년에는 아이슬란드로 망명했으나 2008년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어려서부터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 난 그였지만, 이러한 비운은 어쩌면 미·소냉전으로 대표되는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이념의 대립이 만들어낸 것인지도 모른다.
자신이 좋아하는 체스만 두면 되는 것이 아닌, 공산주의자들의 공격을 늘 염두에 두면서 모든 일상생활을 해야만 했던.
어쩌면 그의 그러한 행동은 단순히 그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당시 시대가 만들어낸 이념의 대립에 길들어져 그렇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즉, 개인적 문제가 아니라 그가 그렇게 된 것은 사회의 책임이지 않을까.
전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인 한반도에 평화의 바람이 불고 있는 요즘이었다면, 그의 생이 그토록 비참하진 않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마이스타 이경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