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이 만들어낸 비극
미국 시카고 카브리니 그린 지역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캔디맨’에 관한 괴담을 소재로 한 영화 <캔디맨>은 공포영화가 아닌 인종차별에 관한 영화라 할 수 있다.
비주얼 아티스트인 앤서니는 과거 자신이 살았던 카브리니 그린으로 이사를 간다. 집들에 참석한 처남은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캔디맨의 이야기를 한다.
캔디맨 괴담이란 거울 속 자신을 보면서 “캔디맨”이라고 5번 외치면, 한쪽 손이 갈고리인 캔디맨이 나타나 공격한다는 것.
이 괴담은 현실로 나타난다. <내 이름을 불러줘>라는 앤서니의 작품 앞에서 두 명의 남녀가 캔디맨에게 살해당하고, 한 사립고교에서 여고생 몇 명이 다 같이 화장실에서 캔디맨의 이름을 부르다 모조리 살해당한다.
이로 인해 언론에서는 앤서니의 작품과 이들 사건에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한편, 빨래방 주인 버크는 앤서니에게 ‘캔디맨’이 탄생하게 된 기원을 이야기해 준다. 19세기 말, 부자들의 초상화를 그리며 먹고 살던 한 흑인남성이 어느 부유한 백인여성의 그림을 그려주다 서로 사랑에 빠졌는데, 여자의 아빠가 남자를 잔혹하게 죽였고 그렇게 그 남자가 ‘캔디맨’이 됐다는 것.
결국 캔디맨은 인종차별로 인해 생겨난 괴물이었던 셈이다.
어쩌면 그런 상황을 외면하거나 혹은 적극적으로 가담한 우리 모두가 캔디맨을 만들어 낸 게 아닐까 싶다.
인종차별은 비단 백인들만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역시, 우리나라에 와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피부색으로 판단한다.
피부색이 검다는 이유로 함부로 대하고,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권리조차 보장하지 않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하다못해 정부 역시 ‘불법체류자’라는 이유로 감옥과 같은 환경의 ‘보호소’에 이들을 가두고 있다.
이런 식이면 ‘캔디맨’이 꼭 시카고에만 있으리란 법도 없다. 오늘도 누군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단지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고통스럽게 죽어갈 수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이제 진짜로 지구촌은 하나라는 인식이 강화되고 있다. 자국의 방역만 강화한다고 코로나19로부터 안전할 수 없다.
해외에서 근무하거나 거주하던 우리나라 국민이 귀국 해 코로나19를 전파시킬 수도 있고, 우리나라 국민이 감염된 채 외국에 여행 갔다가 전파시킬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여전히 ‘우리 민족’ ‘우리나라’만 강조하며 외국인을 배척하면 공존이 불가능하다.
해외에서 국내에 들어오는 외국인 중 감염자가 있으면 무상으로 치료해 주고, 국내에 체류 중인 외국인에 대해 무상으로 백신을 접종해 주는 것은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한 조치다.
왜 우리가 맞을 백신도 부족한데 외국인까지 공짜로 놔주냐고 하는 것은 상당히 편협한 생각이다.
부디 영화 <캔디맨>으로 인종차별을 비롯한 모든 종류의 차별에 대해 관객들이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시간이 됐으면 한다. 오는 22일 개봉.
/마이스타 이경헌 기자